소녀, 엄마가 되다

작성자 : 맘스코리아 (atatop@naver.com)

 

 

중·고등학교 한 때 나는 기독교 신자였다. 내가 다닌 교회에는 법무부 소속으로 여성과 관련한 일을 하는 고위공무원인 권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종종 학생들 대상 강연을 했고, 주된 내용은 자신이 관리하는 미혼모와 여성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분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윤락여성’이었는데 그것은 계몽되어야할 대상에게 보내는 비하와 멸시의 언어였다. 지금은 양성평등에 따라 ‘미혼부’를 병기하고, ‘매매춘’이라 정정 표기되는 시대이지만 40년 전만해도 미혼모와 윤락여성은 소위 ‘타락하고 방종한 여자’의 상징이었다. 한국만 그랬을까?

 

1970년대 초 프랑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베네딕트 델마스 감독의 <소녀, 엄마가 되다>는 미성년 미혼모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얼룩진 그 시절의 프랑스 사회를 비판한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미혼모 쉼터’로 향해야했던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유와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관료주의로 무장한 원장은(국가기관의 관리자가 다 그렇듯)원칙과 규정을 내세울 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인물이다. 강간 피해자인 어린 임산부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이중고통에 노출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직설적이고 도발적이다. 감독은 성폭력 피해 여성을 바라보는 당대 프랑스 사회를 관객 앞에 툭 던져놓는데 예컨대 “그 남자는 너 때문에 피해를 입을 게 많다”는 경찰과 딸의 임신에 분노가 극에 달해 인연을 끊으려는 엄마가 등장하는 오프닝시퀀스에서 2차 피해에 방관하는 세상을 질타한다. 심지어 ‘강간당했다’는 말보다 ‘15세 육감적인 소녀, 임신하다’는 표현이 더 좋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은 경악을 금할 길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혼모는 기관으로 보내지고 원장의 통제 하에 출산까지 관리된다.

 

국가가 특정부류를 통제하는 시스템은 ‘분리’와 ‘관리’를 기반으로 한다. 사회와 가족과 학교와 정상으로부터의 분리이다. 그들 대다수는 성폭력 피해자이지만 사회의 시선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성에 머물러있다. 분리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이다. 완강하게 거부할 수 없는(거부과정에서 남성에게 피해를 입히면 폭력범이 된다.) 상황보다는 ‘미성년 여성이 임신했다’는 말에 무게를 둔다. 부정하고 타락한 여성의 육체는 정상적 사회로부터 분리시켜야한다는 것, 욕망의 주체이며 독립적인 여성을 응징하는 주류이데올로기의 방식은 이렇듯 분리로 시작한다.

 

분리가 선행되면 관리는 수월해진다. 죄지은 여인, 고작 열네 살에 임신한 아이, 충분히 저항하지 못한 피해자로 둔갑한 아이들은 자책과 자기멸시로 감옥 같은 시절을 견뎌야하고, 이를 통제하는 중심에 국가기관으로 상징되는 원장이 있다. 영화는 소녀들이 권리를 주장하고 시위를 통해 성과를 이루는 것으로 끝난다.

 

1972년 이후 미혼모는 학교수업에서 배제되지 않았고, 미혼모 쉼터는 수가 줄어들다 76년 완전히 사라진다. 아쉬운 건 미혼모의 단체행동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인물인 마리프랑스가 상류층(하층민과 유색인종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적 판단이 결여되었다는 편견의 위험성을 내포한)이라는 점이다. 상업영화가 채택한 서사에서 누군가를 앞장세울 때 종종 범하는 실수이다.

 

올해 초 광풍처럼 한국사회를 강타한 ‘me too’는 나도 그렇다는 것을 넘어 우리도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with you’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피해자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자신과 피해자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 짓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40여 년 전 사회 멸시와 차별적 시선과 국가시스템에 저항하고자 거리로 나온 소녀들이 외치던 “우리는 미혼모입니다. 강간당한 건 난데, 왜 날 탓하나요?”라는 구호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 특임교수이며 영화무크지 「영화로운대구」 편집주간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고전영화 보는 모임 ‘키노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