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들> 유려하고 지적이며 풍성하다

작성자 : 맘스코리아 (moms@momskorea.co.kr)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하고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다가오는 것들>은 철학 선생 나탈리의 일상을 통해, 사적이고 공적인 영역을 넘나들며 오늘의 프랑스 사회를 탐색한다. 주목할 점은 일상에 대한 관찰에만 머물지 않고, 기성세대의 현실적 고민을 사회관계망 속에서 풀어헤쳐보였다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한 쪽 책장을 사회과학서적으로 채웠던 80년대를 통과한 세대’의 현재 위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것. 영화를 보는 내내 대학시절 내가 선배들에게 느꼈던 것들 혹은 오늘날 청춘이 우리 세대에게 느끼는 실망감, 어쩌면 무한반복일지도 모를 삶의 모습들이 스틸처럼 스쳐지나간다.

세대 간 촉발된 사회정의 실현에 관한 해법은 그 자체로 해묵은 논쟁거리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동일하게 진행되어왔다.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마침내 애제자까지 비판을 서슴지 않는 지점에 이르면, 주인공은 떠나보낸 것들만큼이나 다가오는 것들도 있음을 깨닫는다. 집단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기성찰이 불러온 필연적 과정이다.

시대변화에 뒤쳐진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순간 또는 홀로 살아가야하는 미래가 선명해지는 시점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어머니이며 아내인 중년 여성이라면 심리적 강도가 더 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매혹적인 것은 일련의 변곡점을 지적으로 극복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홀로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 홀로서기도 준비해야한다. 학교와 제자와 출판사를 비롯한 지적 동조자들 사이에서 뿌리내린 나탈리의 지적·학문적 독립이 요청되는 순간이다.

철학 선생으로서의 인지도도 희미해져가고 변화하는 시대와 유리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시점에서 시작되는 영화지만, 감독의 시선은 나탈리에 고정시키기보다는 타인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행동에 주목한다. 클로즈업이 아닌 변화된 관계망을 통해 나탈리를 도드라지도록 만들었다는 것. 나탈리의 일상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거리를 유지한다. 지나치게 가까운 것도 아니고 너무 멀리도 않은 간격이다. 대상을 통해 말하기보다는 대상이 일으키는 화학작용을 주목하라는 암시일 것이다. 이자벨 위페르의 표정과 연기가 건조한데도 불구하고 더 없이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단과 사회 속에서 나탈리의 내적흐름이 어떻게 변하는가에 주목한 사려 깊은 선택은, 평범하게 끝날 수도 있는 모노드라마를 소소하지만 묵직한 사회극으로 바꿔놓는다. 이자벨 위페르라는 우리시대 최고의 배우를 앞세우고서도 당당히 자기 이야기를 펼쳐내는 젊은 감독의 결기가 마음에 와 닿은 까닭이다.

아도르노와 푸코와 호르크하이머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거쳐 급진주의자 유나바머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막론한 지성사의 거장들을 호명하는 영화에서, 파스칼의 『팡세』를 읽는 장례식 장면은 건조한 스크린에 윤기를 더하는 빛나는 순간이다.

새로운 연대와 행동이 촉발되는 현장에서 머뭇거리며 현실을 수습하기에 급급한 기성세대. 엄마와 남편이 떠나고 아이들마저 떠났을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 같다”고 말한 그녀였지만, 결국 다가온 것은 삶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본능을 읽어버린” 늙고 뚱뚱한 고양이를 떠나보낸 나탈리는 스스로 선택한 변화에 잘 적응할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모인 자식들과 손주를 향한 나탈리의 눈빛과 표정은, ‘삶이 철학이고 철학은 곧 삶’이라는 전언에 다름 아닐 터. 포근함과 가슴 따뜻함으로 채워진 엔딩 시퀀스마저 발군인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 물 흐르듯 유려하고 지적으로 풍성하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 특임교수이며 영화무크지 「영화로운대구」 편집주간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고전영화 보는 모임 ‘키노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