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해,말순씨] 어머니에게 보내는 뒤늦은 연서

지독한 소박함으로 소환한 ‘평범한’ 어머니

작성자 : 맘스코리아

지독한 소박함으로 소환한 평범한어머니

 

군부독재정권하에서 비굴하게 복종하고 정의롭지 못하게 처신한 남성과는 달리 이 땅의 어머니들은 시대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의연하게 가정을 지키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몰두했다. 영화는 이런 여성과 어머니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효자동 이발사 시절을 뒤로한 채 남겨진, 엄마 말순씨와 아들 광호의 이야기가 후편 격으로 펼쳐지는 <사랑해 말순씨> 또한 평범하지만 위대한 어머니를 소환한다.

<사랑해 말순씨>는 특별할 것 없이 소박하게 가정을 지켜온 평범한 여인, 그 어머니에 관한 진술이다. 신파의 정조를 지녔으되 신파를 멀리하며, 눈물 흘려도 부끄럽지 않은 사모곡이다. 권력 앞에 비굴했던 시절,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이야기를 섞어가며 유신시대를 극복해가는 부성애를 그려낸 영화가 <효자동 이발사>라면, <사랑해 말순씨>는 시대적 배경을 조금 앞당겨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내러티브만큼이나 클라이맥스도 없는 심심한 일상이지만 고집스럽게 착하고 억척인 말순씨에겐 매일이 전쟁이다.

배경은 격동의 80년대 초 서울이다. 신군부가 들어서고 광주가 짓밟히는 역사의 한 순간일지언정 말순씨와 광호의 시선은 가정과 학교에 고정된다. 성적호기심 가득한 사춘기 아들을 옆에 세우고는 화장품 외판원으로 홀로 가정을 돌보는 고단한 엄마를 세상으로부터, 심지어 아들로부터 고립시킨다. 이 단절된 세상에서 영화가 달려갈 고지는 오직 엄마 사랑해라는 단어이다. 사춘기 남자아이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엄마 사랑해, 라는 말. 영화는 그 말 한 마디를 위해 달려간다.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이지 않고, 굳이 신파를 동원해 억지 눈물을 유도하지 않는 건, 오로지 엄마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아들의 행적을 보여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전작(<인어공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특유의 소박함으로 한 우물만 파는 박흥식의 고집이어서 가능했다.

책과 영화는 위대하고 특별한 어머니만을 보여주었다. 최소한 성공한 아들을 두었거나 역사와 민족 앞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의 어머니를 기억해 왔다. 아니면 한 인간이자 여자로서의 욕망을 갈구했거나 구원의 상징으로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말순씨는 여태껏 영화를 통해 만나온 어머니의 모습과 궤를 달리 한다. 무식하고 천박하기까지 한 말순씨는 그 시절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 어머니이다. 민주투사의 어머니도 아니요, 법관이 된 아들을 둔 행상인 휴먼드라마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말순씨는 홀로 남은 광호가 힘차게 자라 중 3이 될 수 있도록 부식토가 되어준 어머니였다. 역사와 기록 뒤에 숨어있던 어머니, 때론 세월과 함께 너무 쉽게 잊혀버린 또 다른 그녀들의 모습이다. 홀로 자식을 키우는 말순씨에게 정치가 무슨 소용이며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대통령이 바뀌고 세상이 뒤집혀도, 제 아무리 폭압의 시대일지라도 아이는 변함없이 꿈꾸고 성장한다. 비록 엄마의 각혈과 눈물이 뒤범벅된 고통의 시간을 자양분으로 섭취하는 아픔을 겪지만, 광호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도 말순씨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녀를 통해 꾸었던 꿈은 시대의 비열함을 관통하고 세상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저 중 3이 되었어요. 보고 계시죠?” 엔딩시퀀스를 채우는 광호의 내레이션은 말순씨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흘린 눈물과 기도의 결실이다.

<사랑해 말순씨>는 그 시절, 부끄러움과 남자다움이라는 상징에 밀려 차마 꺼내지 못한 채 비굴하게 살아온 남자들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뒤늦은 연서이다. 지독하게 심심하고 소박하지만, 고집스럽게 아들의 입을 통해 평범한 어머니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고 공식화시킨 영화. 그러니 힘들고 지쳐 쓰러질 것 만 같은 그 순간, ‘어머니이름을 떠올려 보라.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이 솟아날 것이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 특임교수이고 경북공무원교육원 전임이며 서울독립영화제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고전영화보기 모임 ‘시네마 옴스’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