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떤 개인 날]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모든 여성에게 바침

맘스코리아

작성자 : 맘스코리아 (atatop@naver.com)

한 여자가 빨래를 넌다. 연립주택 옥상 위로 펼쳐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하다. 탁탁 털어 가지런히 줄에 걸고는 하나씩 집게를 꽂는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바로 전 장면, 극중 처음으로 딸아이에게 밥을 차려주고는 같이 밥을 먹는 그녀, 딸아이를 꼭 끌어안는 그녀는 지방강연을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왔다. 거꾸로 재구성한 <어떤 개인 날>의 마지막 시퀀스다.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은 이혼 1년차인 작가 보영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여성의 고립과 상처를 보듬는다. 감독은 보영의 며칠간 행적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동안 싱글맘의 불안과 근원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속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철저하게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이지 않은 접근방식이다. 오로지 자연인인 여성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말하자면 고립의 연원을 찾아내되 굳이 상처를 치유하고자 무리수를 두지 않음으로써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는 것.

 

 

대체로 여성영화들이 담으려 애썼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은 곧잘 현실과의 괴리감을 매우지 못한 채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여성영화가 소수영화의 범주에 머물러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인데, 그에 반해 여성운동가 출신이라는 이력이 무색할 정도로 <어떤 개인 날>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한결 현실적이면서 인간적이다. 이를테면 보영은 구차스런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쿨 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지만 재혼을 앞둔 전 남편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이와 가정보다 사회활동에 더 열성적인 듯해도 딸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치며, 혼자서도 굳세게 살 것 같지만 사소한 일로도 친구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인물들의 역할이 분산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한 감독은, 보영 뿐 아니라 정남의 목소리 전달 방식까지(연수원 숙소 장면에서, 보영은 이미지로 정남은 사운드로 인물의 특징을 표현해낸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강연을 맡아 지방 연수원으로 간 보영은 같은 처지의 이혼녀 정남과 한 방을 쓴다. 두 여자가 밤을 가로지르며 술을 마시면서 속내를 털어놓는 시퀀스는 여성감독이 아니면 도저히 뽑아내지 못할 흥미로운 장면이다. 그녀들의 속사정과 신변잡담 유의 수다가 뒤엉켜 난무하고 있음에도 보영과 정남이 주고받는 대사는 리듬감을 동반하며 지루할 틈을 보이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을 보낼 동료이자 같은 처지인 두 여성이 경계하듯 마음을 조금씩 내보이고 교감하다가 누구는 이내 심사가 뒤틀리고 또 다른 이는 흐느껴 울기까지, 김도영과 지정남, 두 배우가 펼치는 걸쭉하고 재기 넘치는 연기(김도영은 이 영화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신인여우상을 수상한다.)는 압권이다. 오랜만에 맛본 대사의 찰기. 그것은 신인답지 않은 뚝심으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수원 시퀀스를 구성한 이숙경 감독의 공으로 돌려야 맞다.

 

 

보영은 그날 밤, 이혼 후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간파한 정남의 충고가 마치 상처에 뿌려진 소금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보영은 타인과 소통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 건 분명했다. 전 남편을 만나도, 오랜 친구를 만나도, 심지어 딸아이에게 조차도 그녀의 의사는 즉각적으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법이 없었다. 거침없이 악다구니를 뱉는 이혼한 아줌마의 형상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 남편이 떠난 벤치에 홀로 앉은 보영의 롱테이크.

 

 

여성의 고립과 상처와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고는 여성 감독의 여성영화라고해서 명쾌한 해답까지 내놓아야할 이유는 없다. 같은 처지라는 이유로 상처받은 여성이라는 유사성만으로 동질감을 형성하고 다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식의 억지스런 설정과의 결별. 요컨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해도 이토록 여성의 상처를 잘 그려낼 수 있는데 말이다. <어떤 개인 날>이 의미를 성취하는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되돌아가면, 긴 밤의 여로에서 돌아온 보영은 딸아이에게 안전벨트라고 속삭이며 행복해한다. 영화 내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감독의 나지막한 전언에 다름 아닌 가장 빛나는 장면. 어쩌면 보영은 스스로를 수동적 위치에 놓아버렸는지도, 여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때문에 산다는 숙명의 굴레에 자신을 가둬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아이의 안전벨트가 되겠다는 다짐인양, 마치 안전벨트를 채워주는 것처럼 뒤에서 아이를 감싸 안은 보영의 표정은 한 없이 평화롭다. ‘어떤 개인 날처럼 화창할 그녀와 이 땅 모든 여성의 삶을 위하여!

 

 

 

 


백정우(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 특임교수이고 경북공무원교육원 전임이며 서울독립영화제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고전영화보기 모임 시네마 옴스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