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애정의 조건] 진정한 애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맘스코리아

작성자 : 맘스코리아 (atatop@naver.com)

[영화 : 애정의 조건]  진정한 '애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영화도 영화배우도 그다지 깊은 관심을 두지 않던 시절, 동네 동시상영관에 낯선 영화가 한 편 걸렸다. 그때는 이다. 잭 니콜슨도 생소한데 셜리 맥클레인과 데브라 윙거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지루한 갈등의 연속인 드라마에서 뇌리에 남은 건 오직 데브라 윙거의 걸쭉하면서 가래 낀 허스키 보이스(그녀가 <사관과 신사>의 여주인공과 동일인물이란 건 한참 후에 알았고, 더욱이 스필버그의 <이티>에서 ‘E.T’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뿐이었다. 빼어난 미인도 아니면서 흑발에 가까운 헤어스타일과 심지어 굴곡 없는 몸매의 여배우라니! 80년대 초, 어느 날의 일이다.

 

1980년대가 되자 미국은 할리우드 2류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맞는다. 이 시절, 강한 미국과 가정회복 두 명제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남성가부장의 시대를 방증 하듯 아카데미는 시대와 철저히 몸을 섞는다. 예컨대 1983년 작품상은 <간디>가 가져갔다. 유력한 후보였던 <이티>는 외계인에게 작품상을 줄 수 없다는(우스개 소리가 들렸던 당시)보수적 태도의 아카데미 벽을 넘지 못했다. 1982년은 <불의 전차>가 공산주의를 품은 <레즈>를 눌렀고, 1981, 마틴 스콜세지 최고의 영화 <분노의 주먹>은 가족회복과 소시민을 다룬 <보통사람들>에게 작품상을 내주었다. 1980년은 눈물 쏟기에 충분한, 그저 그런 가족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가 작품상의 주인공이었다. 1984년은 제임스 브룩스 감독이 연출한 <애정의 조건>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머와 비극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현대 가족관계에 대한 고찰로 울적한 미국식 신파의 전형을 구축한 <애정의 조건>은 그해 아카데미를 비롯해 전미 비평가협회 주요 상을 휩쓸어버린다.

영화는 엄마와 딸의 기나긴 애정싸움에 대한 친밀한 보고서이다. 동시에 차마 살의를 품지 못한 모정의 숙명을 따라간다. 셜리 맥클레인이 연기하는 오로라는 성마르고 자기방어적인 여성이면서 딸에 대한 애정이 과한 엄마이다.

 

딸 엠마를 출산한 이후 아이가 잘못될까 밤잠을 설치며 애지중지한 오로라에게 대학 수학강사인 예비사위가 성에 찰리 없다. 딸 결혼식에 불참하면서 모녀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이 때부터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갈라진다. 그러니까 엠마와 가족의 이야기가 한축이고, 오로라와 옆집에 이사온 우주비행사 게럿의 이야기가 다른 축이다. 두 개의 플롯은 엠마와 오로라 사이를 밀고 당기면서 모였다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제임스 브룩스는 모녀와, 모녀와 관련된 두 남자를 통해 애정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것은 영화 원제인 Terms of Endearment, 즉 애정의 유효기간에 대한 질문이기도하다. 감독은 가정회복이라는 시대적 명제와 손잡으면서 신파를 피하려 애쓴다. 남편과 불화하며 은행원과 외도를 즐기는 자유주의자 엠마와, 숱한 신사들을 제쳐두고 한량인 게럿을 택하여 순정을 바치는 오로라를 대조함으로써 가족 내 갈등을 신·구가치의 불화로 확장한다. 이를테면 품위와 고결함을 중시하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갈등 극복에 소극적인 엠마를 통해 새로운 시대(그러나 오히려 구태의연하고 보수적인)를 바라보는 70년대의 저항적 몸짓을 담았다. 여기서 감독의 영민함이 빛을 발한다. 불량하고 무례하며 건들거리는 전직 우주비행사 게럿은 어떻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오로라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대학교 수학교수인 지적인 남자 플랩의 이기적 사고는 엠마와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아내를 무너뜨리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는 것. 상충되는 캐릭터가 서로 작용하여 시대를 횡단하는 이야기는 엠마의 죽음과 함께 무거운 공기를 드리운다.

 

 

다수의 평자가 지적했듯이 평행선을 달리던 모녀가 안타까운 엔딩 직전 화해함으로써 가족의 가치를 확인한다는 점은 진부하다. 그러나 우리는 엠마가 아이젠하워 시대에 태어나 뜨거운 모성 속에 살다 닉슨 시대에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마침내 레이건 시대에 가정의 균열을 맞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가족에 매몰된 한 여성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을 잊지 말아야하지만 (대게의 신파가 그랬듯이 그러나 제임스 브룩스는 달랐던) 그럼에도 엠마의 아이들은 무책임한 아빠 플랩이 아닌 할머니 오로라가 맡는다는 사실에서 안도한다. <애정의 조건>이 빤한 신파멜로 직전에서 극적으로 귀환하는 순간이다.

애정을 지속시키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목적 없고 좌표 없는 사랑, 오직!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상대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희생은 애정의 조건이 아님을 영화는 선언한다. 숱한 구혼자들이 오로라가 딸에게 헌신한 방식 그대로 애정을 드러낼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닌 숨 막히는 족쇄였다. 허허실실 장난기로 무장한 개럿의 힘, 보수적이고 견고한 가정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힘은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정신에 있다는 사실, 시대를 초월하여 <애정의 조건>이 던지는 전언이다. 낮은 나무울타리를 앞에 마주선 오로라에게 점심 데이트를 신청하는 개럿은 말한다. “, 이리로 와요. 너무 멀리 떨어져있지 않소


백정우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 특임교수이며 영화무크지 「영화로운대구」 편집주간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고전영화 보는 모임 ‘키노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