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이 빚은 광기의 순간

작성자 : 맘스코리아 (atatop@naver.com)

우리시대의 장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걸어도 걸어도>의 한 장면.

 

“요시오 군, 그만 와도 되지 않아요? 이제 그만 부르자고요.”
“왜 그래야하는데”

“왠지 불쌍해서요, 우리 보는 거 괴로워하는 거 같고”

“그래서 부르는 거야,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요시오가 죽인 건...”

“그게 그거지, 부모가 볼 땐 똑같아.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번 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타인을 구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장남 준페이의 기일마다 모이는 가족들, 매년 그날이면 찾아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의 부모와 가족에게 사죄하고 올바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남자 요시오. 당분간 아르바이트 하다가 전단지 만드는 일을 할 예정이라는 그는 열심히 살아가겠노라 다짐한다. “그때 준페이씨가 구해주셨더라면, 저는 이 자리에도 못 있었겠죠”라는 문법과 예법에 어긋난 말은 기어이 아버지를 분노케 한다(내 자식이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도, 네가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다). 뚱뚱하고 무능력하며 언어구사도 안 되는, 고작 저런 녀석을 위해 자기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는 사람 중에 엄마가 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 부엌에서 엄마와 마주한 차남 료타는 요시오를 그만 오게 하자고 말한다.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불쌍하다는 이유에서이다.

 

바로 직전 장면으로 돌아가면 두 사람의 대화는 스모선수 이름 기억해내기와 아들이 건넨 용돈에 흐뭇해하며 어디에 쓸지를 고민하는 내용이다. 엄마를 연기하는 키키 키린의 유머러스함과 달뜬 표정이 고단한 하루를 위로할 안온함으로 다가오는 순간 아들의 말은 엄마를 얼어붙게 만든다. 굳은 표정의 엄마는 애써 마른 침을 삼키며 말한다.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너도 진짜 부모가 되면 내 마음을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가족을 위해 남편의 외도를 견디며 살았고, 장남 기일에 노래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통해 넌지시 내보일 수밖에 없던 여자를,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를 참아가며 신념을 밝히는 건조한 엄마를 고레에다는 키키 키린의 연륜과 세월이 빚은 통찰에 맡긴다. 그것은 연기자가 아닌 여자이면서 엄마인 한 여성의 읊조림이고 자식 잃은 부모의 심장 파열음이다. 연기가 아니라 일상이 그 공간으로 틈입한 사례다. 일순간 눈빛이 달라진 키키 키린의 신념에 찬 목소리, 모성이 빚어낸 광기의 순간이다.

 

우리는 유사한 장면을 봉준호의 <마더>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죽은 여자아이 집에 문상 갔다가 문전박대당하며 “우리아들이 안 그랬거든요!”라던 김혜자의 살기 가득한 표정 말이다. 광기의 모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갓집에서의 이 표정은,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물장수를 죽일 때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가족을 등장시키고 가족주의를 앞세운다고 ‘가족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얕은 수법은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 섣부른 가족회복 시도는 상처받은 이들을 영영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반면 고레에다의 영화는 근원을 파고 들어간다. 그의 가족영화는 전통과 규범을 존중하면서 현대적 양식과 융합한다. 주목할 것은 견고한 가족주의를 배태한 남성의 몰염치와 권위주의의 대응양식으로서 다져진 여성인 엄마를 중심축에 올린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남성을 비롯해 주요인물이 하나같이 엄마(또는 여성)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는 건 이 때문이다. 엄마의 따뜻함과 너른 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레에다가 바라보는 가족의 초상이 여기에 있다.

 

남을 위해 대신 죽은 자식을 품은 엄마의 마음, 격렬하게 화내고 소리칠 힘이 남아있을 리 없다. 자식을 향한 그리움이 살아남은 이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치환되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인지상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날것의 모성이 아닐까. 누가 감히 엄마를 비난할 수 있을까.

 


백정우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 특임교수이며 영화무크지 「영화로운대구」 편집주간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고전영화 보는 모임 ‘키노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