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서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기사도 정신이 갇힌 남성성

작성자 : 한국애드 서순정에디터 (hkad1770@chol.com)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읽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하게만 느껴져요. 교황이나 왕들 사이의 싸움이나 전쟁, 그도 아니면 돌림병 얘기만 하고 있으니까요. 남자들은 모두 옳고 잘난 사람으로만 표현되어 있는데 여자들 얘기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고 있잖아요.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에서 캐서린 몰랜드가 역사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19C 초반만 해도 역사는 오로지 남성의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남성은 모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남성이 인류의 역사를 대표하며 남성의 역사가 곧 인류 전체의 역사His Story였던 것이다. 이처럼 남성은 남성 대 여성의 이원적 구조에서 늘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들 남성 또한 본질적으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 속에 종속된 존재로 타고난 힘과 권력의 표상으로서의 남성성이 아닌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다면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네가 남자답게 이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옛 시가지에는 이슬람왕국의 흔적이 가득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함브라 궁전을 비롯해 알바이신 마을까지 모두가 무슬림 왕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사벨의 가톨릭 왕국에 의해 1492년 이슬람왕국이 몰락한 당시 마지막 왕, 무함마드 12세는 종교와 재산을 지켜줄 것을 담보로 그라나다의 무혈인계를 감행했고, 그 이유로 왕의 어머니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승산 없는 전쟁으로부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지켜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를 그 상황에서마저도 남자답게 전쟁을 치르는 것이 우선시 될 정도로 남성성이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고대로부터 발달해 온 해부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한 소위 남성성이란 것은 중세의 기독교적 이념과 맞물리면서 영향력을 점점 확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을 안심시키고, 종속된 사람을 보호하고, 딸린 가솔들을 부양하는 것이 중세 남성의 의무였으며 이러한 중세의 남자다움을 대변하는 것이 기사도 정신이다. 이민족의 침입 등 혼란 속에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던 중세 초기, 남자는 거친 전사이길 강요받았다.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기사가 중세의 지배층으로 성장했고, 이후 유럽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남성적 강인함에 세련된 교양까지 겸비하는 것이 기사의 덕목이 되었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하며 필요한 재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남성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조롱과 비난을 감수해야했다. 남성 노동 중요성의 약화와 여성권의 신장, 첨단 기술과 대량생산, 제국주의의 몰락과 냉전의 종식 등 다양한 영향으로 전통적인 남성성이 침식되어가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넘어지면 혼자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의 갑옷 속에 갇힌 중세 남성성에 대한 통념은 현대의 청년 세대 담론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