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목소리를 오롯이 품다

백성을 섬긴 곳 수원화성

작성자 : 한국애드 박선경에디터 (hkad1770@chol.com)

“수원 화성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여덟 글자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한 남자의 애절한 효심에서 탄생했다. 조선 22대의 왕인 정조로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으로 꼽힌다. 조선 성곽 건축의 꽃이라고 불리는 수원 화성은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양주 배봉산에 있던 능침을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성으로 옮기면서 축성됐다. 화성은 정조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였으며 당시 조선의 첨단 건축기술과 과학, 예술적 감수성이 모두 집대성됐다. 단순히 돌로 둘러싼 둘레 약 5.7Km의 성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그림인 조선의 신도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백성을 생각하는 정조와 정약용의 마음이 더해져 완성된 합작품이다. 최신 도구를 이용해 인부들의 수고를 덜고, 막대한 공사비를 줄여 백성들의 혈세를 막았다. 외세에 바람 잘 날 없던 조선을 강하고 부유하게 하며 이것을 정치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정조는 공사 시작 2년 만에 화성을 완공했다.

정조는 24년의 재위기간 동안 모두 13번의 원행(圓行)을 했다. 특히 정조 즉위 20년이 되던 해에 이뤄진 1795년(을묘년) 행차는 그 규모와 풍경이 남달라, 「원행을묘정리의 궤」에 글과 그림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창덕궁에서 참배하고 융릉까지. 총 거리 29.2km로 이어지는 정조대왕 능행차는 총 8일간 진행됐다. 당시에 축성 중이던 화성을 점검하는 등 왕권 강화에 가장 큰 목적이 있었지만 단순한 행차로 끝나지 않았다. 재위 기간 동안 66회에 걸친 행차에서 백성들의 생활 형편을 살피고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가까이에서 소통했다. 정조의 행차에서 상언과 격쟁 3,355건이 올랐고 환궁한 뒤 꼭 필요한 조취를 취했다고 한다. 백성에 대한 남다른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멀고 높게만 느껴졌던 임금을 가까이에서 만난 백성들은 작은 것에도 귀 기울여주는 나라님에 대한 충성심을 새기며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다. 정조는 능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생활상을 파악하고 갈등을 해결함으로써 ‘화합’하는 정치를 만들어갔다. 이렇듯 화성은 정조가 평소 꿈꾸던 이상향을 담은 장소였다. 치열했던 당쟁에서 비롯된 당파 정치를 근절시키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장소라 할 수 있다.

 

 

수원 화성은 단순한 군사적 용도인 성곽의 개념을 넘어 그 안과 밖에 살고 있는 ‘사람’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아무리 튼튼한 성곽을 쌓아도 그것을 지키는 군사들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정조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국왕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백성들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과 백성들 스스로가 화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수원에 화성을 쌓은 정조의 마음을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보호하고 그 주변에 사는 백성들을 지키고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 그것이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진정한 이유였다.

이처럼 정조가 수원 화성에 투영하고자 했던 마음은 ‘사랑’이었다. 뒤주 속에서 갇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능을 지키려 했던 아들의 마음, 어린 아들 순조가 성군이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주고픈 아비의 마음, 거기에 조선에 살고 있는 온 백성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고픈 군주의 마음이 복합된 곳이다. 정조와 수원 화성의 핵심 연결고리는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다.

 

 

Tip> 체험학습 떠날 때 미리 보면 좋아요!

우리 아이 첫 수원화성 여행 김명선 저|삼성당
수원화성 김준혁 글/ 양은정 그림|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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