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죽음만큼 확실한 미래의 이야기가 있나요?

죽음을 향한 두려움의 끝에서 만나는 믿음

작성자 : 한국애드 서순정에디터 (hkad1770@chol.com)

우리에게 죽음만큼 확실한 미래의 이야기가 있나요?

죽음을 향한 두려움의 끝에서 만나는 믿음

6월 21일, 북반구에서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날 영국인들은 윌트셔 주 솔즈베리에 있는 스톤헨지(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2008년 수정)를 찾아 일출을 기다린다. 신석기 시대 고대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스톤헨지를 찾는 사람들은 영국 토착 켈트 다신교 신자를 비롯한 고대 종교 신봉자들뿐만이 아니다. 그저 이곳에서 일출을 보며 건강과 안녕을 빌고 싶은 관광객들도 많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고대인의 무덤에서 삶의 결의를 다지는 풍경이다. 당신에게, 우리에게 죽음만큼 확실한 미래의 이야기가 있을까.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지는 인간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종교가 있다. 철학이 될 수도 있겠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종교와 철학자, 사상가에 따라 다르며, 같은 종교라 할지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인식은 변해왔다. 기독교와 불교, 힌두교에서는 죽음 이후 나란 존재가 천당이나 지옥 혹은 연옥으로 가던지 혹은 윤회를 한다고 믿는다. 반면 공자는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라며 사후세계에 대한 불가지론을 폈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원죄에 따른 대가로 생각하지만 대신 죽은 예수로 인해 죽음을 극복하였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판의 날 하늘나라로 초대 받는다 믿었고, 다만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천국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바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며, 멜랑콜리(우울)가 발생한다. 낭만주의시대에는 죽음은 죄와 무관하며 고통도 없고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지극히 무상한 세계에서 항구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썩지 않는 것’에 대한 고찰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교에 따르면 생과 사는 자연적인 과정에 불과하며 죽음을 편안한 휴식으로 받아들인다. 도교에서는 죽음과 삶이 모두 자연적으로 변화하는 것의 흔적이라 본다. 예와 지금을 초월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적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그 일체감이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죽음은 육체에 대한 영혼의 보살핌이 마감되는 시점에 해당되며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기쁨을 뜻한다. 오늘날의 죽음은 어떠한가? 병실에 갇힌 죽음은 성직자가 아닌 의사에 의해 심판 받는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민간신앙에서는 죽은 뒤 혼은 파리와 같은 작은 생물이 된다고 믿었고, 필리핀 슬로드 족은 귀뚜라미, 슬라브에서는 새, 아일랜드에서는 나비가 된다고 믿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죽음을 향해 필연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종교가 우리에게 쥐어 준 신뢰는 궁극적인 종교의 힘일지도 모른다.